해외 여행기

비신자의 이스라엘,요르단 여행(6) -예루살렘-

언제나 일번 2019. 6. 10. 10:57

어제는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입국할때 시간을 많이 허비하여서 일정이 바빠졌습니다.

원래 어제 사해 부근에 있는 여리고(Jericho) 지역을 들렸어야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생략하고 오늘 아침에 한시간 일찍 일어나서 여리고 까지 가서 그 지역의 유적을 보고 오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합니다.

이후 예정대로 예루살렘 구시가지 지역을 대부분 걸어서 살펴보는 조금은 힘들겠지만 6000개의 작은 상가가 모여 있다는 시장 골목이 기대 됩니다.


예루살렘은.

사해()로부터 25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데, 지중해성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의 더위를 겪는다. 동()예루살렘에는 사적()·성적()이 많으며,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해마다 전세계에서 이곳을 찾는 순례자와 관광객이 많다.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정부 청사와 히브리대학교·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있다. 또 금속·담배·플라스틱·신발·전기기구 공장 등이 있다.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의 한 부족이 그 동부에 성시()를 지어 거주한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이 도시는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평화의 도시’라는 뜻이다. BC 2000년대 중엽부터 이집트의 파라오()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뒤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이하 생략. - 예루살렘 [Jerusalem] (두산백과)


먼저 오늘 전체일정 궤적입니다.


남쪽으로 45km를 달려서 여리고(Jericho)에 도착하여 시험산(Mount of Temptation)을 조망합니다.

지형상 여리고는 헬몬산 자락으로 BC5000년경에 해저 390m에 형성된 고대도시로 예루살렘 해발 760m에 에 비해서 1200m정도 낮은 곳이다. 


엘리사의 샘(Elisha Spring Fountain)

여리고 물의 근원은 에인 에스 술탄(Ein Es Sultan)이라고 불리는 오아시스로 샘은 1분에 1,000갤론 이상의 물을 여리고에 공급하고 있다. 수량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주변은 과즙이 풍부한 과일 산지로 유명하다.



삭개오 돌무화과 또는 뽕나무(Tree of Zacchaeus)


도로에 세워져 있는 아치형 문. 내용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 지역은 아주 강경한 반 이스라엘 시위가 빈번하게 발생하여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리고 지역 유적들을 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 지역의 궤적입니다. 동쪽 올리브산 언덕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갑니다.


예루살렘에 돌아와 먼저 찾은 곳은 주기도문 교회(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주기도문 교회는 예루살렘 올리브산(Mount of Olives)에 위치한 예수승천교회 근처에 위치해 있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가 지목한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기념하기 위하여 첫 번째 기독교 로마 황제가 세운 4개의 교회 중 하나이다. 비잔틴 시대에는 올리브산 공회당(Basilica of Eleona)라고 불렸으며, 현재 교회 건물 동쪽 지하 동굴에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장소(누가복음 11:2-4)를 기념하는 교회터가 남아있다. 현재 교회의 이름은 주기도문의 라틴어 시작 부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Pater Noster”는 곧 “우리 아버지”를 의미한다.
614년 페르시아 군의 예루살렘 점령에 의해 파괴 되었으나, 1106년 십자군이 폐허 속에 작은 예배당을 만들었고, 1152년 덴마크 주교의 후원을 통하여 완전한 교회로 복원되었다. 1187년 살라흐 알-딘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심각한 피해를 입은 교회는 그 후 예루살렘을 통치한 맘룩조에 의해 1325년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만다. 19세기 프랑스 황녀인 아우레리아(de la Tour d'Auvergne)가 폐허가 된 주기도문 교회 부지를 매입하여 1867년 에 이탈리아풍의 회랑을 짓고, 1872년 카르멜 수녀원을 만들었다. 오늘날의 교회 건물은 1874년에 폐허가 된 옛 교회 북쪽에 세워진 것이다. 주기도문 교회 입구에는 히브리어아람어 외에도 약 100여개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쓰여있다. 주기도문 교회 [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 (두산백과)


여기서 부터 걷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Old City 건너편 동쪽 올리브산 언덕에서 예루살렘 전경을 조망.

바로 앞에 작은 직사각형 형태가 모여 있는 곳은 유대인 묘지

묘지를 찾은 랍비. 머리에서 발까지 검정색.


예수눈물 교회(Dominus Flevit Church)

현재 남아있는 교회는 6세기경 비잔틴 양식의 소성당이 있던 자리에 1955년 겟세마네 교회를 설계하였던 이탈리아인 바를루치가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을 형상화하여 재건축한 것이다.

교회 입구에 재현 해놓은 고대 유대인 유적.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 만국 성당(Church of All Nation) 또는 고뇌의 성당(Basilica of the Agony)이라고 부릅니다.


만국성당 옆, 벼락 맞은 올리브 나무. 이곳의 나무들은 수령이 2000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겟세마네 동굴(Gethsemane Cave)


Lion's Gate


문위에 사자 네마리가 보인다.


베데스다 연못(Pool of Bethesda)


성 안나 교회(Saint Anne Church)


십자가의 길, Way of the Cross(Via Dolorosa)


로마 시대의 성벽위에 덧쌓은 성벽. (아치형 문 흔적이 보인다)


이스라엘, 요르단의 화장실 사용은 대부분 돈을 받는다.


구간마다적소에 구간 표시가 되어있다.

성묘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기독교 구역 안에 위치한 성분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즉,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히브리어로는 Golgotha, 라틴어로는 Calvary-해골이라는 뜻) 언덕과 그의 분묘를 담고 있는 교회이다.


'십자가의 길'의 제10지점부터 제14지점까지가 이 교회 안에 위치한다. 

성묘 교회는 오늘날의 구 예루살렘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서기 336년에 처음 교회가 만들어 졌으나, 페르시아인에 의해 614년에 파괴되었다. 그 후 테도시우스 수도원장인 모데스터스(Modestus)에 의해 다시 건립 되었으나, 1009년 이슬람 파티마 왕조의 알 하킴 빈 아므르 알라(al-Hakim Bi-Amr Allah) 칼리파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세워진 것이며 그 후 여러 번에 걸친 개축과 보수가 이루어졌으나 오늘날까지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교회 내부는 가톨릭교, 그리스 정교회, 콥틱 기독교, 시리아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각각 구획을 나누어 사용하고 있으며, 교회의 열쇠는 이슬람 측이 소유하고 있다. 성묘교회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두산백과)


골고다(Golgotha)/갈바리(Calvary)
예루살렘 성벽 바깥에 있는 언덕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된 곳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과거부터 성묘 교회가 골고다 언덕 위에 세워졌다는 전승이 내려와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름은 그리스어 '크라니온(Κρανίου)'에서 라틴어 '칼바리오(Calvario)'로, 영어 '캘버리(Calvary)'로 변화했는데 모두 해골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언덕의 지형이 해골의 모양과 비슷했거나,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정교회가 관할하는 십자가 못 제대가 있는데, 그 아래에 있는 구멍을 통해 십자가가 세워졌던 홈을 볼 수 있다. 


성유석(聖油石, The Stone of Anointing)/도유석(塗油石, The Stone of Unction)

정면의 현관으로 들어가면 바닥에 닳아서 윤이 나는 붉은색 대리석 하나가 깔려 있는데, 이 판석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서 이곳에 눕히고 향유를 바르며 염한 성유석으로, 성유석의 뒷배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성화에도 그 내용이 묘사되어 있다. 성유석 네 귀퉁이에는 네 개의 촛대가 세워져 있으며, 성유석 윗부분을 가로질러 걸려 있는 여덟 개의 등잔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콥트 정교회·정교회·가톨릭에서 봉헌한 것이다. 사실 이 돌 위에서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는 전승은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알려진 것으로, 오늘날 볼 수 있는 성유석은 1810년에 깔았다. 그럼에도 종교적인 의미가 크기 때문에 성직자들이 성유석 앞에서 예배를 드리며 뿌리는 성유를 손수건이나 천에 적셔 가져가려는 순례자들로 항상 붐빈다. 


유대인 상가 구역. 아랍인 상가보다 훨씬 깔끔하다.



통곡의 벽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이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하는데 이 용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고 했다. 당시의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여 성벽은 이스라엘로 넘어왔다. - 통곡의 벽 [Wailing Wall] (두산백과)


좌측에 마가의 다락방, 우측에 다윗왕의 무덤


다윗왕의 무덤



베드로 통곡 교회(St. Peter in Gallicantu)



예수님이 걸어 올라왔다는 돌계단길. 한국인들이 계단의 돌을 빼가는 사례가 많아서 철제 울타리를 설치 했다고 하는데.


버스정류장, 간이 매점.


팔레스탄인 지구 장벽.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들도 참여 했다고 한다.